차명상

[스크랩] 한마음의 길-1. 한마음법의 원리

Teaman 2007. 2. 21. 10:45

마음 공부하는 이들을 위한 오디오 북

한마음의 길

한마음법의 원리편

 

제1장. 영원한 감로의 법

불교란 특정한 가르침이 아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되는 그러한 종류의 가르침이 아니다. 진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불교라 함은 이름이다. 참으로 불교를 배우고자 하면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서의 불교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도리를 쫓아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 공부이다.

불은 영원한 생명이요 교는 진리를 설하여 놓은 좋은 말씀이다. 불교가 지향하는 것은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서 무와 유가 둘이 아닌 한마음으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살아서 깨닫고 살아서 부활하는 가르침이다.

불법의 진수를 만나기가 억천만겁이 지나도록 쉽지 않다는 말은 불법을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중생의 마음이 스스로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에 많은 가르침들이 어렵다고 해도 불법은 어렵고 높아서 훌륭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훌륭한 것이다.

불법은 따뜻한 봄바람과 같다. 얼어붙은 마음, 가슴아픈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준다. 부처님 법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다. 모든 착각들을 흔적없이 삼켜버리며 다시금 빛나는 순금으로 재생시켜 준다.

부처는 나의 마음에 있다. 우주를 감싸고 삼세를 덮는 부처님, 조사와 선지식들, 일체 생명이 다 내 마음 가운데 있으며 누구든 조상님들도 다 내 마음 가운데 있다. 무엇이 있어 밖에서 찾을 것인가? 부처님은 한 분이라 할 수도 없고 많다고 할 수도 없다. 아니 계시다 할 수도 없고 수없이 계시다 할 수도 없다. 누구나 깨달으면 이 이도 부처, 저 이도 부처, 수만명이 부처인 것이다. 또 모습은 달라도 깨달음의 마음은 다 하나요 궁극에는 그 하나조차도 없다 할 것이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란 개별적인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전체가 한마음으로 한데 합쳐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또 부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도 없다.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 하는 것은 다만 이름일 뿐이다.

내가 있기에 부처가 있다. 부처의 형상이 내 형상이며, 부처의 마음이 내마음이며, 불성 또한 다를 바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생명에 불성이 깃들어 있으며 일체가 다 부처라고 선언하셨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말씀인가?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러한 평등과 긍정의 정신은 너무도 광활한 것이어서 크다느니 높다느니 하는 말조차 초라하다.

 

제2장. 한마음 주인공

불성이란 우주를 감싸고 있는 대원리이다. 이 우주 삼라만성에 불성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다. 불성은 무시이래로 있어 왔고 지금도 있으며 영원토록 있을 것이다. 불성은 진리요 영원이요 모든 것이다. 불성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일체의 근본이다.

불성은 오직 하나라는 의미에서 한마음이요, 너무나 커서 한마음이요, 전체라서 한마음이다. 일체만물이 그로부터 비롯되니 한마음이다. 이세상 모든 생명의 마음은 하나이다. 모든 생명들끼리는 사실 너와 내가 없다. 본래로 생명은 하나이다. 본래 생명은 부처이다. 그러므로 본래 생명의 마음을 일컬어 한마음이라고 한다.

발전소에서 내 집 전등에 이르도록 전선을 가설해 놓고서 스위치를 올리자 불이 들어오듯이 나의 마음 은 한마음과 연결되어 있어 그 근본이 다르지 않으니 나의 근본이 곧 만법의 근본이라 이름하여 주인공이라 한다.

주인공을 불성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바로 이 주인공이 있음으로써 중생은 노예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모든 것을 다 쉬고 맡기게 되면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이치도 주인공 그가 본래 자유스럽기 때문이다.

주인공 텅 비어 걸릴 것이 없다. 그런 주인공을 일컬어 한마음이라고도 하는데 그 한마음은 말이나 생각에는 잡히지 않을 만큼 미묘 불가사의하다.

나무에 비유하여 내가 열매라면 주인공은 열매를 맺게 하는 꼭지와 같고, 내가 꼭지라면 주인공은 그 꼭지가 매달린 가지와 같으며, 내가 가지라면 주인공은 그 가지가 돋아나온 줄기와 같다. 내가 줄기라면 주인공은 비유하건데 뿌리와 같으니, 뿌리는 나무가 있게 된 근본이다. 그로부터 줄기와 가지와 잎과 열매가 나왔듯이 나의 모든 생각, 나의 모든 활동, 나의 모든 공덕이 그 주인공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다.

주인공은 나의 참된 근본이다. 내 몸, 내 생각은 돋아났다가 곧 쓰러지는 가지, 잎과 같으니 뿌리는 가지와 잎이 떨어지고 꺾이면 새로운 가지와 잎을 돋게 하듯이 주인공도 그러하다. 그렇다고 나의 주인공이 나무의 뿌리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 육안으로 보여지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만약 모양이나 음성으로서 부처를 구한다면 필경 여래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눈 아닌 눈으로 보아야 한다.

주인공은 차라리 뿌리 아닌 없는 나무라 할 것이며 한 점 찍어서 맛볼 수도  없는 허공 같이 형상과 감각을 초월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컬어 자성이라고도 하고, 여래장, 진여, 참나라고도 하며, 주인공이라고도 하는 이 나는 중생이 흔히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과는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은 거대한 용광로이다. 이 보이는 세계와 더불어 함께하는 일체 제불의 보이지 않는 절실한 대 원력이 언제나 함께하는 용광로이다. 그러한 용광로가 내 속에 있다. 어떤 쇠든지 용광로에 들어가면 다 녹아 내리듯 그 어떤 눈물도 자비로 화하고, 그 어떤 아픔도 감사의 염으로 되살아나게 하는 용광로가 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어떤 업도 어떤 환란도 그 앞에서는 한점 눈송이로 보이는 주인공은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의 심묘한 비밀이요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불성으로서의 불가사이한 힘이다.

주인공은 무한량의 에너지, 무한량의 능력일 뿐, 쓰고 안쓰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하기 나름이다. 그러므로 중생심을 끊고 참나를 얻는 게 아니라, 도리가 그러함을 발견함으로써 거짓의 나 또한 참나의 한 나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그냥 아빠라 해도 좋고, 엄마라 해도 좋다. 신주라 불러도 좋고, 평상심이라 해도 좋다. 천수, 생명수라 해도 좋고, 신봉이라 해도 좋다. 주인공을 한 물건이라 해도 좋고 본래 면목이라 해도 좋다. 한 놈도 없는 그놈이라 해도 좋다. 아미타불이라 해도 좋고 본존불이라 해도 좋다. 포괄적인 주청이므로 하느님이라 불러도 좋고 마애님이라 해도 좋다. 주인공은 무엇이든 다 될수 있어서 도무지 고정됨이 없다. 주인공은 어버이이자 자녀이며, 가장 높은 이이자 가장 낮은 이이다. 주인공은 이름이 무엇이든 자신을 이끄는 참 자기인 것이다. 주인공은 나의 나요, 내 마음의 마음이다.

주인공이라고 하니까 개별적인 나로 알면 안된다. 주인공이라 하면 이미 전체를 의미한다. 일체법을 감싸고 일체법을 지탱하며 일체법을 굴리는 그 자리를 주인공이라하는 것이니 어찌 내 주인공이니, 네 주인공이니 나눔이 있겠는가?

 

제3잠. 나의 실상

먼저 나를 잘 알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중생의 본래 성품은 원만하고 공적하여 태어난다든지 죽는다는지 하는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지는 법이 없으나, 중생의 실제 생활을 보면 삼독심에 물들어 마침내는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로 원만공적한 참 성품이 구족해 있다는 이  문제가 풀릴 것 같으면 불법의 참맛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내가 없다면 태초가 어디 있으며 우주가 어디 있으며, 현상계는 어디 있다고 하겠는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없다면 부처도 불법도 또한 그럴 것이니 먼저 자신을 알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나고서 세상은 벌어졌다. 나로 부터 이 세상이 생겼고 나로부터 가정이 생겼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으니 내가 나오면서 이세상 우주전체가 벌어진 것이다. 나를 빼놓고 무엇을 이 세상이라 하며 무엇을 진리라 하며 무엇을 가르침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참모습, 진짜 자기의 뿌리와 씨를 알아야 한다.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말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소소영영하게 응대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자동차는 운전자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주인이라 하고 운전자를 그 하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운 일이겠는가? 주인공을 모른다면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육신이란 본래 공한 것이어서 한 철 살다가 어느날 한 찰나에 구름 흩어지듯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이 나라고 고집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 육신이 나라는 욕심 때문에 모든 일이 어긋나고 있다. 나라는 욕심만 없다면 보다 넓게 볼수 있고 넓게 들을 수 있고 넓게 일할 수 있고 지혜의 샘물이 철철 넘쳐 아주 싱그럽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나는 만법의 근원이다. 마치 임금이 있어 신하들이 모든 일을 처리해 나아갈 수 있듯이 참나가 있음으로써 오감을 통해 움직이는 내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보이는 나는 안보이는 나의 신하로서 또는 시자로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이란 참나의 시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거짓나를 나로 알지말고 참나를 발견하라 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참나인 주인공에 일임하라 하는 것이다. 시자는 시자일 뿐이니 주인을 믿고 따르면 그 뿐, 주인을 제쳐두고 제가 나서서 주인 행세를 하는 한에는 고통과 액난이 따르게 마련이다.

우리 몸은 겹겹으로 되어 있으면서 매장마다 수천억의 세포가 있고 세포안에 다시 수없는 미생물이 있고 장마다 수많은 세균이 살아 있으니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와 같이 우주도 헤아릴 수 없는 별들로 이루어지고 그 중 하나의 혹성인 지구에 또 수없이 많은 생명체가 우글거리고 그 중 하나인 인간의 육신 속에 또 그러하니 생명의 숫자는 그야말로 불가량이다. 그렇지만 움직이는 근본 하나만 깨닫는다면 그 근본은 일체의 모든 생명과 둘이 아니요, 그대로 우주 온 법계의 작용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제4장. 둘 아닌 도리

세상은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이다. 그 근본은 뿌리, 즉 주인공이요 부처의 단체이다. 그
뿌리로부터 수많은 가지와 잎들이 나타난 것이 곧 현상계이다. 그러나 이것도 방편으로써 나누어 설명하는 말을 꾸몄으니 그러할 뿐이지 사실은 하나라고 바로 알아야 한다. 각각의 잎을 생명체로서 비유할 수 있지만 뿌리와 잎이 본래 따로따로인 것은 아니다. 모든 움직임이 바로 한마음에 있다. 모두가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와 나의 몸뚱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가 나와 연관되어 있고 나 아닌게 없다. 고로 사생이 둘 아니게 통신이 되고 안팍으로 법망이 쳐져 있으며 허공에도 길이 있고 우주 전체에 생명들이 꽉 찼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내마음이 둘이 아니고, 부처님의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며, 부처님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니다. 일체 만물의 생명과 나의 생명, 일체 만물의 마음과 내 마음, 일체 만물의 몸과 내 몸도 둘이 아니다. 내가 먹으면 부처님, 조사님이 다 먹고, 산신이 먹고 용신이 먹고, 지신이 먹고, 토신이 먹고, 일체가 다 먹는다. 내가 차 한잔 마시면 우주 전체와 함께 먹는 것이다. 내가 잘 먹으면 잘 먹는대로 못 먹으면 못 먹는대로 항상 함께 한다. 내 중생 하나 구원할 수 있다면 남의 중생도 전부 구원된다. 나 아닌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 몸이 청정하면 다른 사람이 청정하고, 다른 사람이 청정하면 한 국토가 청정하고, 한 국토가 청정하면 일체 중생이 청정하다 하는 것이다.

일체 대상을 내 몸과 같이 보는 게 불심이다. 대상을 높게 볼 것도 없고 낮게 볼 것도 없다. 평등하게 보라. 같다고 보라. 둘이 아니라고 보라. 현상계에서 보면 뚜렷하게 둘이면서도 근본자리에서 보면 둘이 아니다. 근본으로는 둘이 아니면서도 색으로는 둘이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앞면의 글씨 써있는 것만 알고 뒷면의 백지는 모르니, 한 종이인데도 뒤집어 쓸 줄 모른다. 우리가 사는 것도 앞뒤가 같이 붙어 돌아가는 것이라서 둘이다 둘이 아니다 라고 할 것 조차 없이 무궁무진으로 닿지 않는데 없고 쓰지 않는 데가 없다. 산 사람과 영계의 문제도 그렇게 종이의 앞뒤처럼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모르니까 산 위로 물가고 물 위로 산이 간다고 뒤집어 놓기도 하는 것이다.

 

제5장. 고정됨이 없는 공의 나툼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다. 나는 지금껏 수많은 곳을 돌아다녔을 것인데 그 돌아다닌 걸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모든 흐름도 그와 같아서 고정된 바가 없다. 앞뒤 없는 피리처럼 안이나 바깥이나 어디에고 머물지 않고 찰나찰나 돌아간다. 이것은 진리이다. 알고 보면 불법이란 모든 사물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그 전부인지도 모른다. 부처님께서 팔정도를 가르치실 때에 맨처음으로 바로 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바로 보면 반야요, 반야는 해탈인 것이니 중생이 바로 볼 수 있다면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고통과 번뇌, 부조리와 갈등은 사라지고 만다.

공은 없다는 뜻의 무가 아니다. 유로 살리기 위한 공, 유나 다름없는 공이다. 유로 창조되어 머물지 않고 유로 나투는 공인 것이다. 살면서 죽고, 죽으면서 사는 그야말로 단 한순간도 고정됨이 없이 흐로고 도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공은 죽은 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공이다. 텅 비었다 함은 꽉 찼다는 뜻이다. 너무 다양하게 많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서 없을 무 하기도 하고, 그것으로도 안되니까 다시 또 없을 무라고 한 것이다.

중생은 유에 사로잡혀서 현상계에 집착하므로 색은 곧 공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잘못 알기 십상이기에 공은 곧 색이라 라고 한 것이다.

어느 때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가? 일어설 때 다르고, 앉을 때 다르고, 움직일 때 다르고, 머물 때 다른데 어느 때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가? 친구를 만났을 때의 나와 형제를 만났을 때의 나가 다르니 어느 때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가? 어린애 적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가? 늙어서의 나를 나라고 할 것인가? 나라는 것조차 고정됨이 없으니 그래서 한물건 조차 없이 공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없어서 공한 게 아니라 꽉차서 공하다고 해야 옳다.

전생이 현생이다. 현생은 전생과 더불어 지금 같이 살고 있다. 사람들은 나오기 이전의 본래 면목을 찾아라 하니까 어제의 나를 더듬어 찾는데  어제의 나는 이미의 오늘의 나 속에 있으니 오직 오늘이 있을 뿐이다. 작년에 씨가 이미 화하여 오늘의 내 속에 오이씨로 있으니 어디가서 씨를 찾을 것인가?

순간이 곧 영원이다. 삼천년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음이 지금에도 살아계신 것이며, 우리의 마음은 역시 삼천년전 석가모니 마음과 함께 살아 있다. 그래서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영원한 오늘일 뿐이므로 석가가 곧 미륵이며 미륵이 곧 아미타인 것이다. 나투는 모습만이 다르고 나투신 장소만이 다르게 보일 뿐이지 그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의 마음이 곧 미래의 마음이며 내 마음이다.

 

제6장. 마음의 도리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며 태양의 근본이 마음이며, 인간이 일체 만법을 운영하고 행하는 것도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이야말로 선악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만드는 전지전능한 창조자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라는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 마음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고, 마음이 없다고 하면 기쁨도 행복도 슬픔도 불행도 없다. 천국도 지옥도 다 마음이 있는 뒤에야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 부처님이 있다,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하는 것은 있느니 없느니 하기에 앞서 마음이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불러들인 결과이다. 문제는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마음이 무엇에 묶여 있는냐 하는 것을 알아 그로부터 자유로와지는데 있다.

마음 근본의 자가발전소는 원자력발전소라 할 수 있다. 아니 태양보다 더한 빛으로 충만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용도에 따라서 무한으로 쓸 수 있다. 빛으로 쓰려면 빛으로 나가고 능력으로 쓰려면 능력으로 나간다. 안팎으로 여여하게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충만해 있다.

깊고 간절한 마음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에너지이다. 진화를 낳고 세상을 개선케 할 에너지이다. 그러나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에너지를 활용하지 못하고 그러기에 현실로 발로가 되지 않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이란 없다. 모든 중생이 본래로 전지전능한 능력을 다 갖추고 있다. 몰라서 못하고 몰라서 못쓸 뿐이지 기적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벽에 부쳐지고 안되던 일이 좀 이루어졌다 해서 능력을 받았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지 말라. 좁은 소견에 불과하다.

기적은 없다. 모든 생명에게는 완전성이 있으므로 오히려 기적이 당연한 것이요 유한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기이한 것이다. 기적은 없다. 오히려 자유자재하지 못하는 중생이 대다수이기에 기적이 특별하게 보일 뿐이다. 꽃이 피어 아름다우니 기적이요 새가 지저귀니 기적이다.

마음이 밝으면 밝은 것일 뿐 운명 때문이 아니다. 마음이 어두우면 어두울 뿐 팔자 때문이 아니다. 부처님 법에는 팔자 운명이란 없다. 삼재니 팔난이니 하는 것도 없다. 부처님법은 시원한 법이다.

 

제7장 인연과 업보

이 우주에는 진리의 그물이 쳐져 있다. 비유하자면 그물 같고 채와 같은 법망이 있다. 그것은 곧 인연의 그물이요 업의 법칙의 그물이다. 우리가 하는 행위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 짓는 생각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다 이 그물에 포착된다. 그 그물에는 귀가 없어도 한 마디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다 듣는 귀 없는 귀, 귀 아닌 귀가 있고, 눈이 없어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볼 수 있는 눈 아닌 눈이 있다. 천수 천안으로 표현되는 그 신비한 원리는 곧 불법의 근본인 것이다.

마음의 작용이란 거대한 컴퓨터에 비유할 수 있다. 한번 일으켜진 생각은 빠짐없이 수록이 된다. 생각한 사람은 그 생각이 사라졌으므로 그만이라고 여기겠지만 그 생각은 어디 밖으로 나가버린 게 아니라 어김없이 자기 마음 안에 입력된다. 그렇게 해서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번 생각을 일으키는데 동원된다. 그러므로 두번째 생각은 첫번보다 더 의지적인 생각이 되는데, 가령 처음 생각이 나쁜 것이었다면 두번째 생각은 조금 더 나빠진 것이 된다. 그와같이 연거퍼 입력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데, 마음이란 이렇듯 자주 생각나는 쪽으로 기울게 되니, 스스로 다잡지 않으면 생각은 점점 자라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마음이 움직여 한 번 생각을 일으킨 것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수록이 되는 것이므로 모든 마음 작용은 현재 의식만이 그 전부는 아니다.

선업도 업이다. 일단 기록된 이상 그 입력이 거꾸로 나를 지배하게 된다. 악업은 나쁜 과보를 낳고 선업은 선한 업보를 낳을 뿐이지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선업과 악업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비유해 보면 둘 다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 경우는 나쁜 주인을 만나서 갖은 고생을 하는 노예라면 한 경우는 좋은 주인을 만나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는 노예인 것이다.

녹음이 되어 있는 테이프에 다시 녹음을 하면 앞서의 녹음 내용은 지워지고 새 내용이 녹음된다. 그러므로 악업보다는 선업을 녹음해야 한다. 그러나 선업을 녹음하기 보다는 악업도 선업도 모두 쉬고 이 도리를 알아 진리에 맡겨둠으로써 공테이프를 만들어라. 비유하자면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먼지에 뒤덮인 거울일지라도 한번 닦아냄으로써 당장 깨끗해지는 것과 같다.

수억겁년 동안 쌓인 죄업이라도 한 생각에 다 녹일 수 있다. 왜냐하면 죄업도 본래는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억년동안 빛 한점 들지 않던 컴컴한 동굴 속일지라도 어느 때 한 줄기 빛이 새어들면 어둠이 순간에 사라지는 것과 같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그 어둠이 얼마나 오래되었느냐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팔자 운명이 따로 없다.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집착을 떼지 못하니까 업이 되고 응보가 있고 유전이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고 받는 것이니 행복과 불행의 열쇠는 바로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제8장 윤회와 진화

살아 생전에 아귀 축생의 마음을 자주 냈으면 죽어서도 아귀축생계를 면치 못할 것이고, 살아 생전에 천상에 오래 있었다면 죽어서도 극락에 갈 것이다. 그것은 누가 보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짓는대로 엄연한 법칙에 따라 그리 되는 것 뿐이다. 상천 중천 하천 세계다 채로 거르듯이 돌아가고 있으니 천당 지옥이 따로 없다. 인간이 하천으로 떨어져 두더쥐 집에 들어가는게 지옥이다. 그러므로 살아서 천상에 태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죽어서도 천상에 태어날 수 없다.

일체 만물 만생에 다 불성은 있으나 살아온 습과 인과로 인해서 자기 차원이 무슨 차원인지도 모른채 그 차원대로 살게 된다. 왜냐하면 앞 못보는 장님과 같기 때문이다. 캄캄하여 보지를 못하니까 잠재의식이 깃들어 있는 습 대로 이리도 들어가고 저리도 들어가고 저절로 차원에 따라 들어가 살게 된다. 사람이 나고 죽는게 윤회이지만 태어나서 늙는 것도 윤회이고 사계절이 돌아드는 것도 윤회이다. 물방울이 돌고 돌면서 천차만별로 생명체를 먹여 살리는 것도 윤회이다. 별들의 생성과 소멸도 윤회이다. 일체 만물 만생이 다 그렇게 하며 산다. 살다가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라 끝 간데 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런 윤회의 고리가 없다면 아마 진리라는 말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생계의 법칙으로서는 업과 윤회가 실재하는 것이지만 근본 자리에서는 그 또한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까지 모두 근본 자리에 놓고 가면 그대로 자유인 것이니 거기엔 먼지 한점 붙을 여지도 없기 때문이다. 텅 빈 자유의 세계, 우리는 그 자유를 믿어 성취해야만 하는데, 그러한 성취로 가기까지 업과 윤회는 우리를 단련시키는 스승이요, 길잡이요, 벗인 것이다. 생과 사, 번뇌와 고통이라는 것도 우리를 진화시키는 벗이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깨달은 사람에겐 나툼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윤회이다. 일체 만물 만생이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나투고 돌아감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은 윤회일 것이나 깨우치면 나툼일 뿐이다.

기어다니는 벌레가 한번 날기를 바랐을 때에 그 날고 싶다는 마음은 진화되는 것이니 마음의 차원이 높아져 육신의 기능이 발달하여 드디어 몸을 벗고 나비로 훨훨 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한 드러냄을 창조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마음의 설계에 의해 밖으로 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창조되고서도 고정된 생각, 고정된 행에 머물지 않으니 창조는 그대로 나툼인 것이다. 마음이 진화와 창조를 이루는 것이니 진화와 창조는 둘이 아니다. 퇴화도 또한 마음이 하는 것이다. 다 마음의 나툼인 것이다. 진화와 창조가 다 한마음의 나툼이다. 진화란 마음의 차원이 높아지는 것을 뜻한다. 마음의 차원이 달라짐으로 해서 육신의 기능도 발달하게 되고 모양 역시 달라지는 법이다. 옛날에 살던 몸집이 크고 흉하게 생긴 동물들이 없어진 까닭은 사는 동안에 마음의 차원이 밝아진 까닭이다. 창조란 곧 마음의 설계에 의해 밖으로 내놓음을 말한다. 마음의 설계가 있음으로 해서 진화된 몸이 겉으로 나온 것이니 진화이면서 창조요 창조이면서 진화인 것이다.

진화의 완성은 대자유 무량공덕의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그 완성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우리와 같은 구도의 형제들이며 삼계는 그런 구도자로 가득찬 대도량이라 할 수 있다.

 

제9장 과학과 우주

물질이 사람을 끌고 가는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물질을 끌고 가는 것이다. 이 근본을 모른다면 물질과학엔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심성으로 되돌려 들어가야 한다. 각 분야의 과학의 바탕은 일체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아무리 많은 과학자들이 분야별로 다양하게 연구를 한다 해도 마음을 알아야만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물질을 쪼개는 기술수준도 높아져 더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인간이 유의 세계의 궁극에 이르러 무의 세계로 넘는 문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부처님만 가르치신 게 아니라 단군, 성인들이 다 가르쳤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교차로에 삶과 죽음이 있듯이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지금은 거꾸로 돌아서 정신세계의 교차로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한마음의 도리에 달려있다.

지금 과학자들이 외계인과의 전파교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물질세계의 오십 퍼센트를 가지고 장차 정신세계로 내디디려는 교차로에 놓여있으니 전파를 통해 외계인과 연락한다 함은 근본도리를 모르는 처사이다. 모름지기 나를 떠나서는 통로가 막혀있으니 마음으로부터 나의 무선전화를 가설해야 통로가 바로 트이고 연락이 된다. 그렇게 물리가 터지면 두루 보고 두루 들을 것이며 두루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마음속의 통로를 알면 벽도 천장도 없으니 그대로 부처님의 평발이다.

자신의 몸일지라도 나의 것은 아니다. 공동체이다. 지금 이 지구 안에 별의별 짐승들이 많듯이 내 몸 속에도 별의별 생명체들이 그득하다. 그러기에 자기 몸이면서도 나의 것, 내 몸이 아니라 공동체인 것이다. 중생들은 이 육신의 나를 자기만의 것으로 생각하지만, 신장, 간, 위와 같은 장기 하나하나에도 수억의 중생들이 있어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육신은 그대로 소우주의 꾸러미와 같다. 오장육부의 기능이라는 게 그대로 우주의 기능과 같다. 거기엔 천체물리학, 지리학, 모든 과학과 철학이 다 들어있다. 사람들은 인간의 처음 모습은 어떠 했으며 지구의 나이는 얼마나 되는가를 궁금해 하는데 우리가 비록 태생이지만 몸속의 온갖 중생도 태생이던가? 그림자 붙듯이 의식이 붙어 모두 화해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껍데기를 벗는다 해도 죽는 게 아니며 생명이 여기에만 있는게 아니라 별들에도 있으니 그대로 불성이다. 생기고 돌아가는 이치가 같아서 이 우주를 한 회사라고 비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지구의 나이가 세살 밖에 안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스스로 어디 살고 있고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정체를 알아보라.

인간은 어떻게 모습을 드러냈는가? 사대가 뭉쳐 사생으로 나투는 중에 원숭이로부터 되었다, 고릴라로부터다, 곰으로 부터다 하는 얘기가 있지만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전자의 진화력에 의해 구르고 구르면서 억겁을 거쳐 갖가지 체로 나투었던 때문이다. 축생이라 해서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이라 해서 인간 대로 고정됨이 없으니 마음대로 자기의 체를 자기가 형성케 한 것이다.

가령 외계에서 지구에 생명체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자 탐사하러 왔다가 북극지방만 보게 되었다면 지구에는 생명체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십상이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일테니 지구는 얼음으로 뒤덮인 혹성에 불과하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른 혹성을 그렇게 보고있다. 전체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한쪽만 보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단순히 지수화풍에 의해서 삼라만상이 벌어졌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한 생명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다. 바람이 불고 물과 먼지가 한데 합치면, 마치 퇴비를 모아놓았을 때 뜨거운 열과 가스가 나오고 쓰레기에서는 벌레가 생기듯, 생명있는 것들이 한데 합치면 능력이 폭발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좋다 나쁘다도 없다. 그저 폭발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생긴 생명체들이 밝음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반사되어 자기의 분수를 알게 된다. 이것이 진화이자 창조이다. 이러한 것이 불성의 조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지수화풍이 합치면서 큰 성질을 이루었다는 것은 지수화풍이 합쳐서 힘이 솟았다는 것이고 힘이 솟았다는 것은 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화하고 나니 지수화풍이란 말도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즉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서 성질을 이룬 것이다. 곧 우주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홀연히 한 생각을 하여 우주를 셋으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의 부분이 우리가 통상 우주라고 하는 것이다.

중세계의 사람들은 부처될 권리를 갖고 있다. 권리는 있지만 무한의 능력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못 쓰는 것 뿐이다. 그러니 자기 깊숙이 있는 한 점의 자기를 찾았을 때 그 금괴를 찾게 되는 것이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지구에서 보았던 것 밖에는 알 수 없고 그것 밖에는 상상할 수가 없다. 다른 나라 다른 일은 모르기 때문이다. 연못에서 놀던 고기가 바다를 알 수 없듯이.

 

대행스님 게송과 선시

온갖 것 참으로 있음 아니며
참마음 오직 홀로 머물러 있다.
그러나 참마음도 실체가 없어서
인연따라 온갖 것 지어내나니
지어진 모든 것에 집착없으면
부처님 그대로 현전하리라.

더럽고 깨끗한 것 수많이 늘어져 있는데
백설이 뒤덮으니 보이지 않고 앙상한 가지마다 눈이 덮여
목마른 그 고통을 한모금 물방울로 뿌리에 내려
푸른 가지마다 꽃이 피네. 하얀 꽃이 피네
바람불어 살을 에는 그 아픔을 물 한방울로 참으며
뿌리로 내리는 나무들
내 꿈은 어떻던가 오솔길의 꿈은
꿈길 속에 지속되는 그 꿈길
장송은 우뚝 서있기만 하누나

 

출처 : http://www.hanmaum.org/ 의 오디오법문

출처 : cheonghyang
글쓴이 : coyot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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