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 주먹의 황제 김두한
김두한의 가족들(가운데 따님 김을동) 김두한의 결혼식 사진 우리들의 영원한 큰 형님 김두한 민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김두한
혁명자 박정희 소장과 함께 그 당시 우미관 식구들
졸린 눈에 팔자걸음? 이 사람이 바로 전설의 싸움꾼 시라소니
이 사람이 바로 정치 깡패 이정재 (박정희의 혁명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
하야시 (선우영빈)
위로부터... 임화수, 유지광, 이정재, 이성순(시라소니)
김두한씨의 육성
‘총 같은 비열한 무기를 쓰면 건달의 생명은 끝이야’
최근 부동의 시청률 1위를 지키고 있는‘야인시대’에서 왕발(이재포 분)이 김두한(안재모 분)을 복수하기 위해 총을 사용하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는 다른 건달의 대사 중 일부다. 그 당시에는 총이나 칼, 방망이 등과 같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닌 오직‘맨주먹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오늘날 접하게 되는 조직폭력배들의 충돌에선 생선회칼, 일본도, 쇠파이프 등의 무기가 등장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또한 초창기에는 대결을 신청해 일대일 승부를 짓고 이기는 사람은 오야붕이 되고 진 당사자는 미련없이 떠나는 게 이들 세계의 관례였다. 반면 최근에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식으로 심야나 새벽 등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간대에 반대파를 급습하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다. 이같이 ‘야인시대’에서 바라본 건달과 우리가 접하고 있는 조직폭력배들의 풍속도는 물과 기름처럼 매우 다르게 보여진다. 그러나 오늘날 조직 폭력배의 시조는 바로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건달로, 사실 명칭만 다를 뿐 같은 줄기다. 이에 따라 새삼 한국주먹의 역사와 계보에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주먹들은 과연 어떻게 변해왔을까. 한국주먹의 변천사를 뒤쫓아봤다. 한국주먹의 세계는 크게 4기로 구분되고 있다. 제1기는 일제시대의 주먹으로, 명분과 대의를 중시한 ‘낭만파 주먹시대’다. 제2기는 자유당 정권 시절 정치적 사건과 연계되면서 등장한 ‘정치깡패시대’, 제3기는 1970년대 피비린내 나는 조직끼리의 전쟁을 통한 ‘전국구 주먹시대’로 대변된다. 그리고 제4기는 합법을 가장한 ‘기업가형 폭력배’로 탈바꿈했다. 의리·명분 중시한 ‘낭만파 주먹’ 일제시대의 주먹들은 핍박받는 민중의 삶과 같았다. 식민시대의 설움과 울분을 가슴에 품었던 그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 여겼다. 지금처럼 칼, 쇠파이프 등 각종 무기가 난무하거나 뒤에서 공격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직폭력배의 태동기를 볼 때, 일제시대 초반 일본 상인들이 야쿠자를 불러들여 명동·종로 상권을 장악하려 하자 이에 맞서 조선 주먹들이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한 때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조선의 중심 경성은 크게 조선인 상점이 밀집한 종로 상권과 일본인 중심의 명동 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조선 주먹은 이성순(시라소니), 고희경(구마적), 엄동욱(신마적), 김기환(쌍칼) 등 전국적으로 내로라 하는 주먹들이 즐비했지만 대부분 개인적인 실력에 바탕, 활동해 조직내의 위계질서와 내부 규율을 갖추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로 보지 않고 있다. 명동의 두목은 하야시. 사실 그는 선우영빈이란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다. 그는 조선내 일본 최대 야쿠자조직의 우두머리로 파견돼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또한 일본 야쿠자들은 일본도로 중무장한데다 고급술집 등 자금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주먹은 조직도 미미했고 이권도 신통치 않았다.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월등한 일본패에 항상 밀리던 조선패가 거대조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종로 우미관극장을 주 활동무대로 활약한 김두한패의 등장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김두한은 우리나라 주먹조직의 시조로 꼽힌다. 당시 김두한패의 주된 활동은 자칭 ‘조선인의 상권 보호’였다. 하지만 말만 번드르 할 뿐 사실상 갈취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 다만 당시 주먹들은 나름대로 일본주먹과의 대항을 일종의 ‘항일운동’으로 생각하면서 김두한을 중심으로 한 ‘협객 신화’를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우미관패는 일본패와 수표교(명동과 종로의 정계) 전투를 계기로 공생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정재 ‘정치’ 업고 주먹세계 제패 해방공간과 자유당 정권시절의 깡패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항상 혼란의 시기에는 법보다 주먹의 힘이 막강해진다는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 셈이다. 물론 정치적 배경을 뒤로 한 게 특징. 당시 주먹세계는 김두한이 정계에 진출한 이후, 명동과 동대문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주먹계의 두 축을 형성했다. 명동은 만주와 이북에서 활동했던 주먹들, 이성순(시라소니), 이화룡 등이 포함돼 있었고 동대문에는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었다. 동대문의 보스 이정재는 꿈이 컸다. 그는 시장 상인조합을 통해 거머쥔 조직과 자금을 무기로 자유당정권의 2인자 이기붕과 손을 잡으며 ‘권력의 우산’속에서 힘을 불려나갔다. 주먹의 효용성을 알고 있던 자유당 입장에서 주먹계의 접근은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자유당 정권은 이정재의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명동 세력을 이른바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옭아매 제거해주기도 했다. 이로써 권력은 단맛을 본 이정재는 자유당 정권에 충성을 바쳤다.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 난입,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개헌 통과에 한 몫을 했던 이정재의 정치깡패 대표적 사례는 57년 5월의 장충단 테러(야당 발기인 대회 방해 사건). 언론에 처음으로 ‘깡패’란 단어를 등장시켰던 이 사건은 자유당 2인자 이기붕의 사주를 받은 이정재가 사돈지간인 유지광을 내세워 경찰의 비호 속에서 벌인, 정치 테러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나 이정재는 경기도 이천을 기반으로 국회의원에 도전하고자 했다가 이기붕이 이곳에서 출마를 선언하자 꿈을 접어야 했다. 이 일로 이정재와 이기붕의 사이는 뒤틀어졌고, 결국 이정재의 몰락을 불러왔다. 대신 자유당은 대타로 종로4가 미라도 극장의 소매치기 출신 주먹 임화수를 키웠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됐으며 동대문사단을 움직이는 일인자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그의 권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 군사정부는 자유당의 비호를 받으며 풍미했던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들을 줄줄이 재판에 회부했고 단죄를 내렸다. 이정재, 임화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유지광은 사형 판결을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아 겨우 목숨만을 건질 뿐이었다. ‘회칼’등과 같은 치졸한 무기 등장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초기 민심을 얻기 위해 깡패를 탄압했다. 이들을 잡아들여 참회 시가행진을 시키는 한편, 국토건설단에 투입하거나 감옥에 보내 뿌리를 뽑으려 했다. 조직 폭력배들은 당연히 뒷골목으로, 또 지하로 잠입해 들어갔다. 그러나 잡초는 밟아도 끊임없이 자라는 법.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기존의 강자들이 사라진 자리를 과거 명동파 이화룡의 부하였던 신상현이 차지하면서 새롭게 부상했다. 육군 상사 출신으로 일명 ‘신상사’로 불렸던 신상현은 ‘신상사파’를 만들어 명동을 중심으로 인근 충무로 및 을지로 일대를 장악, 70년대 중반까지 명실상부한 주먹 세계의 일인자로 군림했다. 하지만 1975년 명동의 사보이 호텔에서 주먹계의 판도를 바꾸는 사건이 벌어졌다. 서울 중심가를 장악하던 신상사파와 주먹계의 원로들이 모여 신년모임을 가지던 중 범호남파가 습격한 것. 이들은 주류공급권과 정기 상납금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왔었다. 이른바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주먹으로 승부 짓는 시대는 사라지고, 생선회칼·일본도·쇠파이프 등의 무기가 등장하게 되는 ‘칼잡이’ 시대가 도래하게 됐다. 기습적인 공격 뿐 아니라 비겁해지고 흉포화하기 시작했다. 또 주먹계의 ‘족보’와는 무관하게 후배가 선배를 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다. 명동을 점령한 호남파는 다시 분열과정을 거쳐 새로운 보스 조양은이 꾸린 ‘양은이파’와 김태촌의 ‘서방파’, ‘OB파’이동재의 이른바 ‘3대 패밀리’구도가 형성됐다. 하지만 이들의 극렬한 대립은 건달세계를 지칭하는 주먹이라는 별칭은 완전히 사라지고 조직폭력배라는 오명이 붙게 했다. 이권추구 방식과 활동공간도 예전에 비해 엄청나게 바뀌었다. 활동공간은 상권 중심에서 대형 유흥업소 중심으로 바뀌었고, 부를 축적하는 방식도 시대가 변하면서 다양해졌다. 채권·채무관계 주주총회 등에도 조폭들이 개입해 ‘해결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주류 도매업은 물론 공사 입찰 건축자재 공급권에도 손을 뻗쳤다. 정치와 연계는 이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87년 호헌철폐, 직선개헌을 내세운 김대중, 김영삼씨가 통일민주당 창당을 시작하는데 지구당 창당때 주먹패들이 방해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명‘용팔이 사건’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은 후에 5공 핵심인사 장세동(당시 안기부장)씨가 계획해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기업가로 위장한 조폭 90년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이후 내로라하는 전국의 두목급들만 2백여명이 구속되면서 거의 와해됐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들어 폭력조직들은 그 동안 축적된 자금력에 바탕, 합법적인 기업인으로 변신하는 사례가 늘었다. 주식 투자의 열풍을 틈타 벤처기업으로의 진출도 현저히 증가하고 있다고 검찰 수사 관계자들은 전했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이들은 대형 권력형 비리 의혹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조폭의 변신에 혀을 내둘렀다. 지난해 G&G 그룹 이용호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사건에는 광주의 ‘국제 PJ파’ 두목 출신인 여운환씨가 등장했고, 2000년 한국디지탈라인(KDL) 정현준 회장의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에는 ‘서방파’ 두목 출신인 오기준씨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같이 거물급 주먹들은 대부분 기업인으로 위장한 것으로 수사당국은 보고 있다. 현재 관리대상인 조직폭력배는 2백여개파의 5천여명 정도. 대부분이 ‘기업가형 주먹시대’로 불리는 이들은 정·관계 인맥을 통해 얻어낸 정보력을 앞세워 부동산과 주식투자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벤처기업이나 다단계판매 사업체 등으로 진출해 철저히 자신의 본질을 위장하는 경향이 높다. 한편 김동회 등 생존하는 주먹 제1세대 원로들은 “선후배 간 위계질서를 엄격히 지키고 싸움에서 치졸하게 흉기를 동원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주먹으로 결판을 내는 사내가 진정한 건달”이라고 밝혔다. 지역 보스를 지낸 바 있는 김모씨도 “진정한 건달은 멋이 있는 사람이다.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나름대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생각만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 강자에 대항해 약자를 돕겠다는 의지는 건달의 기본이다. 인(仁)과 의(義)는 깡패와 건달을 구분하는 갈림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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