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재배차의 시작, 川原茶
전라북도 정읍시 천원리에 가면 천원차라는 차가 있었다. 일본인 오가와(小川) 씨가 해방되기 직전까지 생산했던 차로 우리나라 재배차의 상품화에 성공해 일본 오사카 등지로 수출해 꽤 인기 있었던 차였다. 그 차는 천원차, 하부차, 결명자차 등으로 불렸다. 아직도 천원리 사람들은 천원차를 생생히 기억하지만 그 차나무는 해방이 되자 사라졌다. 당시 차밭을 미원(대상그룹 전신)이 인수해 차산업에 손을 댈 뻔 했다는 비화 등 천원차의 과거와 현재를 70년만에 조명해본다.
옛 천원차 나무 소유주 기서명씨가 차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나라 재배차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 땅에서 덖음차가 만들어진 시기는 1930년대 말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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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경 오가와 씨가 천원리에 심었던 차나무는 이제 단 두그루만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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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차를 만들었던 곳은 천원 정미소로 바뀌었다가 폐쇄됐다. |
알려진 바로는 하동군 화개면에 살았던 김복순(金福順), 조태연(趙泰衍) 씨가 1965년 지리산 죽로차(竹露茶)와 작설차라는 이름으로 1967년 경상남도로부터 식품허가를 받아 본격적으로 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본지 취재 결과 화개골에 전설이 된 '작설영감' 조병곤 씨가 그보다 20년 가량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본지 2월호). 1948년~49년 사이 화교 출신 독립운동가 청파 조병곤이 화개골에 들어와 우롱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차를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갖다 주고 1년 양식값을 타오곤 했다는 것이다.
일본인으로는 1932년 경 전남 광주 동구 광산동 일대에서 오자끼 씨가 무등원 차밭에서 5백근(300㎏)정도를 생산했고 1925년~1945년 사이 오가와 씨가 전북 정읍 천원리에서 천원차(川原茶)를 생산하면서 이 땅에 차문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전남 강진 월남리에서 이한영 씨가 1939년 무렵 '백운옥판차'라는 상표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상품화한 차도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인으로는 오자끼와 오가와 씨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이한영, 청파 조병곤, 김복순 씨 등이 있다.
그 뒤를 이어 화개에서 화개제다 홍소술 사장이 '옥로'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광주에서는 서양원 사장이 감로를 생산했으며, 보성에서는 1941년 장영섭 씨가 일본 사람이 만든 30정보의 차밭을 인수, 대한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1957년부터 봉로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뒤 태평양화학이 설립되면서 한국 차산업은 세계화ㆍ대중화에 성공했다. 지금은 차시장이 연간 2000억 규모로 발전해 WTO 개방이라는 위기 속에 한국 덖음차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봐야 할 시점이 되었다.
미원, 차산업 손대기 직전 미원 개발
1945년 무렵 대상그룹의 전신인 미원이 정읍에서 피혁공장을 시작으로 사업에 손을 댄다. 피혁공장을 설립한 임대홍 씨는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군청 산업과로 발령받아 공무원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아 해방이 되자 정읍에 피혁공장을 세운다. 그 때가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그 무렵 임대홍 씨는 정읍시 임암면 하부리 근처에 1945년 해방과 함께 일본인이 귀국하면서 버리고 간 차밭을 인수, 과수원으로 개관한다. 당시 차산업이 비전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임 씨는 차산업 보다 식품산업에 더 관심이 많았다. 50년대 중반 고질적으로 번진 밀수 행위로 일본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이미 한국을 휩쓸고 있었다. 보다 못해 그는 직접 조미료를 만들기로 마음먹고 일본으로 들어가 오사카의 보꾸리마찌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온갖 노력 끝에 조미료 제조공정을 모두 습득한다.
그 뒤 1956년 부산으로 돌아와 동대신동 대림상공 건너편에 건평 150평 규모의 조그마한 조미료 공장을 세우고 미원을 개발, 일약 기업가로 성공한다. 만약 그 시절 임대홍 씨가 조미료 기술을 습득하지 않고 인수한 천원리 차밭을 확대하여 차를 생산했다면 한국차산업의 역사가 바뀌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태평양이 차산업에 손을 댄 것은 1970년 경이다. 작고한 서성환 회장은 한국제다 서양원 사장의 도움을 받아 차산업에 진출해 설록차라는 브랜드로 한국 차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이것이 한국 현대 차산업의 소사(小史)다.
오가와 씨가 70년 전 생산한 천원차(川原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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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견된 천원차 포장지 |
당시 천원리에 살았던 월담 권녕수 씨는 대상그룹(미원의 전신)이 천원차를 손댈 뻔했던 비화 등을 들려주었다.
천원차는 오차(葉茶)로, 1920년 대 말에 시작되어 해방 직전까지 임안의 천원리에서 생산되었으며, 당시 호남선 철도 공사에 종사했던 일본인들의 정착과 함께 재배되었다. 생산된 제품은 전량 일본 오사카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천원리에서 천원약국을 경영하는 주인에게 천원차에 대해 묻자 그는 아주 반가워하면서 "몇 해 전까지 일본에서 오가와 씨의 손자가 다녀갔었다"며 천원차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다.
1999년 12월 정읍 천원리를 찾은 뒤 꼭 3년 만에 지난달 19일 정읍을 찾았다. 당시 정읍시청에 근무하면서 1998년 정읍다인회를 주도한 김기문 씨를 만났다.
현재 정읍 북면장으로 있는 그는 필자를 보자 반갑게 맞으며 3년 전 천원차를 취재한 점을 높이 사며 정읍시와 함께 천원차에 관한 학술회의를 개최해 보자고 제안했다.
3년 전과 비교해서 정읍의 차문화는 놀랍도록 바뀌었다. 정읍시가 80억을 투입해 차밭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야생차밭을 비롯해 정읍시 고부면에 야생차나무 군락지가 발견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0년 7월 임안면 사무소가 작성한 「임암면 차나무 관련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일제시대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천원차를 생산하면서 녹차 생산의 최적지로 여겼다. 또한 토질, 자연, 풍광이 차 재배에 알맞은 지역으로 일명 하부차가 생산된 곳으로 일본으로 반입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고 되어 있다.
천원차 상표에 따르면 우수 전람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던 천원차는 임암차, 하부차 등으로도 불렸으며, 하부리는 우리나라 최대의 재배차 적지로 손꼽혔다. 당시 차나무는 과수원으로 가꾸면서 거의 없어지고 기명서(임암농협장) 씨 소유의 임암면 하부리 만화마을에 있는 두 그루의 차나무가 당시 천원차의 역사를 말해준다. 77년 이전까지 차나무가 많이 자생했으나 토지 소유주인 기명서 씨가 감나무 등을 심으면서 차나무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현재 두 그루만이 있는 것이다. 당시 하부리 뿐 아니라 천원역 뒤편 차밭은 논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본인들도 즐겼던 천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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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당시 천원차를 만들었던 허호순 할머니가 천원차의 내력을 증언했다. 오른쪽) 천원차밭이었으나 논밭으로 변한 하부리 일대 |
제차 방법은 우롱차의 제조법과 매우 유사했다. 찻잎을 비빈다음 10시간 정도 온돌방에서 발효시킨 후 다시 볶은 후 말려 차약으로 사용했다. 천원리에 사는 허호순(87) 할머니는 "그는 차를 손수 따서 천원리 차공장에서 가공했다"면서 "차맛은 오차맛과 같고 마을 사람들이 그 향과 맛에 취했다"고 말한다.
천원 차공장은 천원 정미소로 사용해오다 몇 해 전부터 정미소가 없어지면서 폐허가 되었다. 천원리 사람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천원차를 우리가 모르고 있으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렇게 명성을 날렸던 천원차를 다시 일본으로 보내자. 정읍시는 차밭 수십만평 조성보다 천원차를 개발, 우리의 상표로 일본차와 한 번 겨루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출처:(월간 차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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